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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투자 재테크

[경제/증권] 주식시장흐름 읽는 방법 제5장 실례로 보는 주식장세 4국면

by SB리치퍼슨 2009. 12. 4.

제5장 실례로 보는 주식장세 4국면


  온고지신-옛 것을 연구하여 새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설명하거나 분석하는 것보다, 예측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다."


  1. 1950-70년대의 주식시장

  주식공급 과잉기를 제외하고 경기와 연동

  제4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론적으로는 경기순환과 주식장세 4국면은 다소의 시간차를 수반하면서도 연동성이 높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실제로 경기변동과 주식시장이 과거의 사례에서 어떠한 움직임을 보였던가를 조사해보기로 하자. 우선 (그림 5-1)에서 볼 수 있듯이 50년대부터 62년에 걸친 주식장세 4국면은 거의 이론대로 경기순환과 금융정책에 의한 긴축과 완화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경기순환에 3~5개월 선행하여 금융정책 실시와 주가의 천장, 바닥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한편 당시의 일본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부흥기에서 경제성 장기로 접어든 시기로 그 성장에 필요한 자원, 에너지는 물론 공업제품의 태반을 수입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는 외화부족-물품부족-인플레이션으로 직결되었다. 따라서 국제수지 동향에 따라 금융정책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주식시장의 최대 관심사는 무역수지와 외환보유고 동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금융정책이 어떤 전기를 맞이하기 이전에 국제수지 상황이 변화하면 강세장세의 경우에는 우선 중간반락을, 약세장세의 경우에는 중간반등을 나타낸다.

  (그림 5-2)에서 볼 수 있듯이 1963~69년에는 그 전까지와 같은 경기변동과 주식장세의 높은 연동성을 볼 수 없다. 이것은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전반에 걸쳐 너무나도 집중적인 액면할당 증자가 이루어져 구조적인 주식의 공급초과 시대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1965년의 증권불황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후인 1966년 이후의 장세에까지 영향을 미쳐 집중호우와 같은 매물압박에 의해 주가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 사이에 기업실적은 회복되어 이익증가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동증1부 상장주식(동증1부상장주식)의 평균 PER은 10-12배까지 하락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꿈과 같은 저 PER 시기였다.

  다음으로 (그림 5-3)에서 볼 수 있듯이 70년대는 경기순환과 주식장세의 국면추이는 재차 연동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연동성 부활의 주요인은 공급과잉주식의 해소이다. 따라서 이 기간은 더욱 주식시장의 선행성이 강해져 금융긴축정책실시 3개월 전에 닛케이 평균주가는 천장을 치고 1975년 4월의 긴축완화, 재할인율의 인하보다 6개월이나 앞서 닛케이 평균주가는 바닥을 벗어나고 있다.


  다만 이 시기에 주목되는 불규칙적인 장면은 1979년의 재할인율 인상과 닛케이 평균주가의 동향이다. 긴축정책이 시행된 후에도 닛케이 평균주가는 1981년 8월까지 상승세를 지속한다 이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불규칙적인 움직임의 요인은 당시의 도쿄시장이 제2차 오일쇼크로 문자 그대로 에너지 쇼크를 받아 시장에서 관심대상이 자원 에너지 관련주에 집중되어, 이 대상종목인 니혼(일본)석유, 데이코쿠(제국)석유 등이 이상 상승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전종목 단순평균주가는 재할인율이 인상되기 3개월 전인 1979년 1월에 벌써 천장을 치고 있다. 즉 과반수를 표시하는 주가지수는 금융정책과 연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2. 1980년대의 주식시장

  일본 경제의 번영을 반영

  과거의 경기순환과 연동을 계속해 온 주식시장의 배경을 간단히 요약하면서 80년대의 강세장세의 특징을 부각시켜보기로 하자.

  1945~54년

  제2차 세계대전 후 인플레이션과 그 수습기. 주가형성에 있어서는 물적증권으로서의 기능이 주목되었다.

  1955~64년

  고도성장경제. 주가형성면에서는 수익률 혁명과 그 반동이 있었다. 주식공급과잉시대에서 증권공황으로 돌입하였다.

  1965~74년

  국제화 및 엔화 신시대, 불황과 광란의 인플레이션에 이어 제1차 석유위기에 휩싸였다. 주가형성면에서는 주식공급과잉으로부터 탈피, 싯가발행 증자의 정착과 PER의 보급이 특기할 만하다

  1975~84년

  안정성장경제로의 전환기를 체험. 제 2차 석유위기, 주가형성면에서는 가치관의 다양화, 지배증권으로서의 기능이 주목을 모았다.

  1985년 이후

  80년대 전반부터 계속된 일본 경제의 번영시대라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되고 미국, 일본, 유럽, 일본의 경제마찰이 치열해졌다. 초저금리시대의 도래와 토지, 주가의 급등. 그러나 경기는 왕성한 설비투자와 개인소비에 힘입어 기록적인 확대가 계속되고 있다. 반면 참의원에서의 여소야대, 소련, 동유럽제국의 급격한 개혁 등 정치적, 국제적으로도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편 주식시장에서는 토지가격의 상승에 따른 중후장대산업의 토지평가익과 사업의 재구축(restructuring)이 큰 재료가 되고, 큐 레이쇼 등 기업의 평가방법이 여러 가지로 논의되어 결국은 국제적으로 너무 높다고 여겨지던 일본의 주가가 적정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국내외에서의 기업 자금조달이 다양화하고 기업의 여유자금 운용이 급속히 확대, 특정금전신탁운용 등 기관투자가의 유가증권에 의한 단기의 운용경쟁이 이루어지는 한편, 인덱스(주가지수)연동형의 시스티머틱(systematic; 체계적인)한 운용방법이 활발해진다. 금융의 국제화가 추진되어 선물시장의 충실과 함께 금융상품의 다양화가 진전된다.

  공전의 금융장세를 전개

  1979~80년에, 즉 제2차 오일 쇼크 직후부터 도쿄시장은 자원 에너지주 중심의 극단적인 파행장세를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향은 1981년부터 경박단소라 불리는 하이테크 그룹 주도장세로 이어졌다. 일본은 성에너지 및 생력화 노력으로 고품질의 하이테크 제품의 세계공급기지가 되고 방대한 무역흑자의 누적으로 외화준비고가 급증하였다. 미국은 재정적자, 무역적자라는 쌍둥이 적자를 안게 되고 이것이 달러화의 급락, 엔화의 급등을 초래하게 된다. 당연한 것이지만 자금이 부족해진 미국의 금리는 상승세를 지속하고 세계최대의 채권국 일본의 금리는 사상 최저수준으로 떨어져 초저금리시대를 맞이했다.

  또한 이 시기에 원유가격도 하락하여 도쿄시장에서는 원유가 하락, 엔화 강세, 저금리에 따른 3저 현상을 배경으로 한, 공전의 금융장세가 전개되었다. 즉 급격한 엔화 상승에 따라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엔고 불황을 실제 이상으로 소리 높임에 따라 주식시장은 그것을 반영하여 극단적인 파행장세를 시현하였다. 실제로 생산활동은 정체되고 은행, 증권, 전력, 가스를 제외한 기업의 수익은 1986~87년에 감소로 돌아섰다.

  (표 5-1)에서 볼 수 있듯이 1983년에 전기, 전자주를 중심으로 한 하이테크 관련장세가 끝나자, 1984년부터는 금융, 공공서비스 관련주 등 금융장세의 주역이 활약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3저 현상에 더해 도쿄만 재개발 관련기업으로서 도쿄전력(동경전력)과 도쿄가스의 주가는 이미 1983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주목을 끈 것이 시중은행을 비롯한 일본흥업은행, 일본장기신용은햄 등 장기신용은행과 기록적인 주식거래량을 배경으로 한 증권주도 사상 최고치를 큰 폭으로 경신하였다.

  이 대금융장세의 클라이맥스에 등장한 NTT의 주가도 공개가격인 119만 7,000엔을 크게 웃도는 160만엔을 시초가로 상장된 후 1987년 4월에는 318만 엔(액면가 5만 엔)까지 상승했다(역주: 1993년 9월 6일 현재 94만 9,000엔). 이와 같이 자본규모가 큰 공공관련주와 금융관련주의 대폭적인 상승에 따라 동증 1부시장의 싯가총액은 1985년 1월의 150조 엔에서 2년 후인 1987년 4월에는 400조 엔으로 증가하여 뉴욕시장의 싯가총액 360조 엔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물론 이 사이에 재정투융자 관련주도 상승세를 보였고 경기후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약주도 큰 인기를 모았다.

  전환점에서 '천장, 바닥 일치'

  GNP 베이스로 보는 한 일본 경제는 1986년 11월부터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반영하여 이 국면에서는 이미 소재산업의 주역이기도 한 철강주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금융장세와 실적장세의 전환은 주식시장에서는 왕왕 격렬하다. 특히 1987년의 케이스는 차트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천장과 바닥의 일치'를 시현하고 있다. 즉 같은 시기에 어떤 그룹은 대천장을 치고 어떤 그룹은 큰 바닥을 시현하고 있는 것이다.

  1987년 4월 도쿄전력은 9,420엔, 스미토모(주우)은행은 5,050엔으로, 각각 공전의 사상 최고치를 시현한 후 하락을 계속하여 1990년 3월 현재까지 이것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역주: 1993년 9월 6일 현재 도쿄전력 3,580엔, 스미토모은행 2,400엔).

 한편 주문격감, 실적악화로 고전하는 공작기계 메이커인 모리(삼)정기는 1984년 3월의 최고치 3,710엔에서 1987년 4월에는 970엔까지 하락했다. 1986년부터 하락한 히타치(일립)제작소는 87년 4월의 844엔을 바닥으로 크게 반등하였다. 그러나 1986년-89년 초에 실적장세의 주역은 정석대로 소재산업이었다. 특히 이 경우에는 대형고로메이커의 활약이 눈에 띄는데 가와사키(천기)제철은 1987년의 블랙 먼데이로 인한 폭락이 있은 바로 다음 주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 소재산업도 1989년 전반기에 거의 힘을 잃기 시작하여, 주역의 자리를 설비투자 관련주에 넘겨주게 된다. 이어서 소비관련주와 계절이 지난 재정투융자 관련주가 재등장한다. 이것은 21세기에 걸친 대형 프로젝트의 이상매입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의 경기확대가 오랜만의 대형 설비투자와 왕성한 개인소비에 힘입은 것이라고 본 주식시장의 선택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후술하는 것처럼 과거의 시황국면에 있어 주도업종의 변화는 동시진행적으로 인기를 모아 왔던 인덱스 펀드의 등장으로 종래와 같은 주식장세의 국면추이에 따른 주도종목의 변화와 파행현상이 엷어져 계절감이 부족한 시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3. 장기파동으로 본 주식장세

  '산이 낮으면 골도 얕다'

  1946년 제2차 세계대전 후 주식시장이 재개된 이후의 주식장세 움직임을 닛케이 평균 장기파동으로 분석해보면 (그림 5-4)와 같이 처음의 3개의 장기파동은 상승기간이 거의 80~90개월이고 이 기간의 닛케이 평균 상승률은 5.3배에서 5.8배로 거의 비슷한 강세장세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에 비해 약세장세 쪽은 다소 들쭉날쭉하다. 최단기는 50년대의 13개월, 최장기는 60년대의 48개월, 하락률도 33.5%에서 44.2%까지의 차가 있다. 이와 같이 1961년부터의 하락장세가 눈에 띄는 것은 인플레이션, 무역수지의 대폭적자, 금융긴축에 케네디 쇼크까지 겹쳐 그대로 1965년의 증권불황으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업의 대량증자 후유증으로 인한 대형 증권사의 도산이 약세장세를 필요 이상으로 길게 했던 것이다. 어쨌든 주식장세는 그 격언대로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라는 파동을 그려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오일쇼크에 의해 일본 경제는 70년대에 들자 마이너스 성장에서 안정성장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74~81년의 장기 상승파동을 보면, 닛케이 평균을 82개월에 걸쳐 상승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승률은 종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4배의 상승에 그치고 있다. 이 기간은 '골이 깊음에도 산이 낮다.'라는 결과로 끝나고 있다.

  그 원인은 오일 쇼크에 의한 에너지 부족, 세계적인 고금리와 경기후퇴가 시작되고 그 때까지 일본의 산업을 지탱해 온 중후장대산업이 모두 구조불황 업종으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즉 닛케이 평균주가가 채용하고 있는 225종목 대부분이 성에너지와 합리화에 쫓겨 실적이 장기에 걸쳐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기간 동안에 한편으로는 일본 경제의 소프트화가 진전되어 세븐 힐레븐(seven eleven; 편의점)과 같은 닛케이 평균주가 비채용종목이 주식시장에 화려하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환경하에서 완만한 상승을 계속해 온 닛케이 평균은 드디어 1981년 8월부터 1982년 10월에 걸쳐 14개월간 닛케이 평균주가 하락률 14.6%라는 비교적 완만한 조정장면을 맞이한다. 이 경우는 '산이 낮으면 골도 얕다.'는 파동을 그렸던 셈이다.

  경계구역에서도 상승기대

  이어서 1982년 11월부터 시작된 강세장세는 산업계의 생존을 건성에너지 및 생력화 투자와 때마침 시작된 정보화의 파도를 타고 처음에는 하이테크 관련주의 대폭 상승으로 시작됐다. 이어서 원유가하락,엔화강세,금리하락이라는 소위 3저 현상의 혜택을 받은 전력,가스 등 공공주와 금리 민감주를 중심으로 공전의 금융장세가 전개되었다.

 이윽고 1986년 11월부터 경기도 회복세를 보이고, 1987년부터 본격적인 경기확대가 시작됨에 따라 주식시장은 금융장세적인 수요우세 요인을 유지하면서도 철강 등 소재산업을 중심으로한 본격적인 실적장세로 돌입하였다. 그 후 1988년에 들에서자 정석대로 소재산업에서 가공산업으로 주역을 바꾸어가면서 상승을 계속하여, 두 차례에 걸친 재할인율의 인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기세를 올리며 상승하여 연말에 걸쳐 사상 최고치(38,915.87엔)를 시현하였다.

  이 사이에 닛케이 평균 상승기간은 86개월째를 맞이하였고 상승폭은 5.6배에 달하였다. 상승기간, 상승폭 모두 과거 10년 사이클 상승파동에서 보면 각각 사상 2위의 상승규모이다. 이와 같이 과거의 주식장세의 중, 장기파동에서 보더라도 당연히 경계해야 할 위치에 장세가 도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투자자는 1990년의 주식장세에 대해서도 여전히 상승장세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것은 경기순환과 주식장세는 다소의 시간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설비투자 확대와 왕성한 개인소비에 힘입은 1986년 말부터의 경기확대가 여전히 지속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경제연구센터 가나모리 히사오 회장도 10년 사이클인 설비투자순환(주글러 사이클)의 상승과 함께 20년 사이클인 쿠즈네츠(Kuznets)의 건설투자순환도 상승으로 전환되어 있기 때문에 이때의 경기확대가 길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일본경제신문 89년 10월 2일자). 확실히 70년대에 착공 예정인 대형 프로젝트 동향을 볼 필요도 없이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기확대에 대해서 많은 이코노미스트들이 장기화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조정국면에서도 1987년의 블랙 먼데이에 의한 폭락과 마찬가지로 단기간에 주식장세가 회복될 것으로 예상하는 경향이 강했었다. 그러나 1987년 당시는 주식장세 국면이 금융장세에서 겨우 실적장세로 옮겨가려는 단계에 있었다. 즉 강세장세 중에서도 가장 탄력이 붙은  상승장세로 얼굴에 카운터 펀치를 맞고 잠깐 무릎을 바닥에 댄 상태와 같은 것으로 곧 다시 일어나 본격적인 실적장세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찾아온 역금융장세

  그러나 플라자 합의 이래의 원유가 하락, 엔화강세, 금리하락의 3저현상을 1989년에 들어 조용히 역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최초의 신호가 1989년 5월 31일에 단행된 최초의 재할인율 인상이었다. 여기서 도쿄시장은 관심대상을 종래의, 저가 대형주에서 중,소형 중고가주로 급전환한다. 그러나 10월 들어 재차 재할인율이 인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금리인하에 따른 미니 3저현상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어 철강주 등 대형주가 일시적으로 반등하였다. 게다가 연말에 걸쳐 인덱스 펀드의 성황에 따라 닛케이 평균주가를 구성하는 일부종목이 이상급등하여 재차 닛케이 평균주가는 불규칙적인 급등장세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1990년 장세에 대한 기대도 연초 이래의 엔화 약세와 채권폭락에 의해 사라졌다. 또 주식장세의 단기 회복기대도 3월에 들어서면서 단행된 재할인율의 제4차 인상에 의해 무너져갔다.

 즉 3저현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엔화약세, 채권약세 주가약세라는 패턴으로 바뀌어 주식시장 국면이 드디어 역금융장세로 옮겨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1990년 장세가 닛케이 평균주가의 장기 파동에서 본 범년 사이클의 조정국면에 돌입했는가의 여부는 1770년 4월 이후의 엔화시세와 금리동향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러나 조기에 엔화약세와 금리상승이 브레이크가 걸린다 하더라도 주식장세 국면이 재차 실적장세로 되돌아가거나 단숨에 금융장세로 전환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역금융장세'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미 각 조사기관에 의한 1991년 3월 결산기의 기업수익 예상은 1989년 말의 예상에 비해 큰 폭의 감소를 나타내고 있다.

  아무리 채권대국이라고는 하나, 도쿄시장은 이번에도 또 주식장세의 국면추이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재인식 시켜 줄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



출처: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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