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하의 창의력 에세이] Nothing exists: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
저자: 박종하 | 날짜: 2005년 01월 21일
화창한 일요일이다. 늦게까지 잠을 자고 점심이 다 되도록 게으름을 피웠다. 특별히 피곤한 건 없다. 하지만, 일요일은 누적된 피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항상 몸이 피곤하다.
오늘은 아내 친구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친한 고등학교 친구다. 이제 게으름 그만 피우고 결혼식장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다. 늦장을 부리며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집은 공용 주택인 빌라다. 우리 빌라는 1층이 주차장인데, 주차장의 입구에 정체불명의 차가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차는 뭐야?”
“전화번호도 안 적혀 있는데.”
늦장을 부리다 약간 늦게 출발을 하던 길이었다. 마음이 조급한데, 주차장 입구를 막고 있는 차를 보니 무지 성질이 났다. 가로막혀 있는 차를 치우지 않고서는 주차장에서 우리 차를 도저히 빼지 못할 거 같았다.
“3층 외국인 차인가?”
“새로 이사온 사람?”
“그래, 처음 보는 번호잖아. 일단 가서 물어보자.”
아내와 나는 3층으로 뛰어갔다. 벨을 누르고 안 되는 영어로 손짓해가며 물었다.
“Hmm .. this car .. your car?”
“I have no car.”
주차장 앞을 몇 번 뛰어다녔지만, 차 주인을 찾지 못했다. 결국, 아내와 나는 택시를 탔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결혼식을 놓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택시는 빨리 잡았다. 이리저리 뛰느라 가빠진 숨을 가다듬고, 기분 좋은 생각을 하기로 했다. 남의 주차장 앞에 차를 세워두고 마음 편히 사라질 사람이 누가 있겠나?
아마 딱 5분 정도만, 어쩔 수 없이, 주차할 곳이 없어서, 세웠을 거다. 딱 5분 안에 일을 끝 내려고 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갑자기 생겼을 거다. 그래서 시간이 아마 10분이 되었을 거다. 우리는 운이 좋지 않아서 그 10분 동안에 그 차와 마주친 거다. 세상은 언제나 공평하니까, 아마 아침에 먹은 약간의 골탕은 오후에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올 거다. 어떤 일의 액땜이었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말야. 아까, 3층의 흑인 말야. 자기는 차가 없다고 하는데, I have no car 라고 하더라. 그치?”
“맞는 표현이잖아?”
“그래, 맞는 표현이기는 한데, 우리 식으로 ‘나는 차가 없다’고 할 거 같으면, I don’t have a car 라고 할 거 같은데, I have no car 라고 하니까. 우리 말로 생각하면 ‘나는 없는 차를 갖고 있다’ , 뭐 이런 거 아니야?”
“그래? 듣고 보니까, 그러네.”
I have no car. 영어에서는 이런 표현을 많이 쓴다. 동사를 부정하는 것보다 오히려 명사를 부정하는 표현이 많다. 하지만, 아내의 말대로 우리 식으로 생각해보면 무척 이상한 말이다. 아내는 외국인이 썼던 영어 표현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런 말 들어봤어? 0의 발견이 인류의 가장 창의적이 아이디어라는?”
“그래? 들어본 것도 같은데. 0이 가장 늦게 발견된 숫자라며?”
“0이란 개념은 정말 수학뿐 아니라 인류의 모든 학문에서 가장 위대한 아이디어야.”
“그래? 뭐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좀 이상하지?”
“뭐가?”
“0이란 없는 거잖아. 그런데, 없는 걸 표현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해? 0을 0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가령, 우리가 아는 공집합 같은 것도 그렇잖아.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거잖아. 뭔가 잘못된 거 아냐?”
“골치 아프다. 모르겠어. 하지만, 그게 필요하고 중요하니까, 사람들이 쓰겠지.”
“생각해볼수록 이상하네. 없는 것의 존재를 말한다. 없는 것이 존재한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 없는 게 존재할 수 있나?”
아내는 골치 아픈 이야기를 시작했다. 택시 안에서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나는 예식장까지 가는 내내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라는 골치 아픈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정말 다행인 건 길이 막히지 않아서 우리가 결혼식장에 생각보다 약간 먼저 도착했다는 거다.
신랑과 신부는 환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예식을 하나하나 수행했다. 결혼식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다.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더욱이 어떤 순간들은 머리 속에서 매번 반복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어떤 순간을 기억하고 있나.
결혼식이 끝나고 아내의 고등학교 친구 5명이 모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라 금방 헤어지지 못하고 근처 커피숍으로 같이 갔다. 여자 5명에 남자는 2명이다. 5명의 친구 중 결혼한 친구가 2명이었다. 2명의 구경꾼이 어색하게 앉아있는 사이, 5명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넌 결혼 안 하니?”
“요즘 같아선 영 생각도 없다. 결혼은 어려운 일인 거 같아.”
“넌 어때? 넌 그 선배 오래 만났잖아.”
“사실, 난 아직도 확신이 없다. 좀 유치한 말이지만, 사랑이 정말 존재할까? 난 그걸 잘 모르겠어. 사랑이란 것이 정말 있을까?”
“맞아. 사랑이란 게 정말 있을까? 사람들이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이혼하잖아.”
“하긴 믿을 수 있는 사랑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거 같아. 막 죽고 못산다고 하다가도 아주 사소한 이유로 쉽게 헤어지잖아.”
“어쩌면 있지도 않은 걸 사람들이 찾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있는 거냐 말이지.”
“어떤 시인이 그러더라. 사랑이란 양파와 같다고. 양파의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양파는 나타나지 않는데, 사람들은 양파가 있다는 걸 알잖아. 사랑도 그런 거래.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존재하는 거고, 의심하고 존재를 찾으려 하고 증명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거.”
여자들의 수다가 끝났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겨우 자리를 지키던 나는 이제 겨우 해방됐다. 1년 만에 만나거나 때론 5년 만에 만나도 친구들은 항상 어제 만난 것처럼 거리가 없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도 친구를 만날 때처럼 편하거나 거리감 없이 대하지는 못한다. 친구라는 이름이 친구들을 언제나 거리감 없이 묶는 것 같다. 아내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지하철을 탔다.
“아까, 말했던 양파 같은 사랑, 기억나?”
“응, 사랑은 양파와 같다며. 이미 존재하는데 찾으려고 껍질을 벗겨도 찾을 수 없는 양파. 좀 유치하다. 그치?”
“뭐가 유치해?”
“아니, 뭐 그러니까. 그런데, 양파라는 시도 있어? 정말이야?”
“그래, 정말이야. 그리고, 그 말 맞는 거 같아. 사랑은 양파처럼 존재한다는 말 말야.”
“양파. 사랑은 양파다. 재미있는 비유야.”
“그런데, 어쩌면 사랑만 양파 같은 게 아니고, 대부분의 것들이 양파 같을지도 몰라. 종교도 그렇잖아.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만 누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겠어? 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신이 존재하니 말야.”
“보이지 않는 존재의 위대함 같은 거군.”
“어쩌면, 모든 것의 존재 형식이 아닐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라고 하는 게 맞을까?”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
“그래, 양파 같이 말야.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존재를 찾을 수 없지만, 존재하지. 사랑이나 종교적인 믿음도 그렇고. 또 인간적인 신뢰나 선한 마음 뭐 이런 것들이 모두 그런 거 아냐?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이미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고.”
“갑자기 아침의 ‘I have no car’가 생각나는군.”
“그래, 어쩌면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가득할지도 몰라”
“모르겠다. 다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 아, 골치 아파.”
주차장을 막고 있던 차는 없어졌고, 우리 빌라는 아주 평온해 보였다. 정작 오늘 결혼한 친구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며 아내와 집으로 들어왔다. 결혼이란 두 사람을 보이지 않는 하나의 고리로 묶는 거다. 어쩌면, 그 고리 역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존재할 수도 있다. 그 고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존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고리가 존재할 것이고, 그 고리의 존재를 증명하고 찾으려고만 하는 사람에게는 그 고리가 존재하지 않을 거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아무튼. 인상 좋았던 신랑의 얼굴이 생각난다. 둘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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